한국에는 메이져 대회가 3개가 있다, 첫 번째가 서울 국제(동아) 마라톤, 두 번째가 춘천 마라톤, 3번째가 서울 중앙 마라톤이다.
금년 3월에 한국을 방문 고국에서 첫 번째 서울 국제(동아)마라톤 대회에 참가 하는 기회를 가졌고 이번 춘천 마라톤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세계 한민족 축전 특별 초청으로 일정상 참가의 기회가 주어져 모국의 2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고국에서 달려보는 뜻있는 기회로 잘 달려보려고 행사 기간 중에도 새벽에 일어나 길도 모르는 서울의 한강변과 대구의 금호강변을 달리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축전이 끝나고도 서울 런너스 클럽 회원들과 수요일 모임인 남산에서도 함께 달리기도 했다.
드디어 출전일이 다가왔다. 허남헌님께서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변화된 고국의 지리를 일거수일투족 눈과 발이 되어 동행하여 주셨다.
여유롭게 춘천에 도착 회원들과 사진 촬영도 하고 대회운영 상황도 점검하고 출발 신호와 함께 출발했다. C그룹에서 출발한 나는 허남헌님과 함께 달리며 변화된 환경의 설명을 들었다.
춘천 마라톤은 1946년 손기정 선수 베를린 올림픽 제패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0월27일 제1회 조선일보 단축 마라톤 대회로 시작됐다. 참가자 45명, 서울 태평로에서 우이동 왕복 15마일(24km)로 첫 개최 되었고 서윤복 선수가 1시간29분24초로 우승 이승만 대통령 김구 선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우승컵을 수여 했다.
1947년 정규마라톤대회로 격상돼 8월9일 태평로~오류동 왕복으로 50명이 출전했다. 오후3시에 출발, 홍종오가 2시간57분20초로 우승하였고 그 후 1954년까지 코스와 거리의 변동이 있었고 6.25 동란으로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1953년에는 대구 달성공원, 1955년에는 태평로~노량진 왕복 9마일(15km)등으로 개최하다, 1970년 대회명칭이 ‘손기정배 쟁탈 조선일보 마라톤 대회’로 개칭되었고, 1979년 10월30일 서울 운동장~의정부 왕복으로 26.2마일(42.195km)의 정식 거리로 개최되었다.
1980~1982년은 도봉구 창동~양주 덕정 검문소 왕복, 1983~1990년 잠실 종합 운동장~성남시 운중동 왕복으로 운영 하다가 1991년 춘천 의암호수 순환코스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는 등 험난한 한국 마라톤 역사의 길을 대변한 대회다.
대회 당일 날씨가 더울 것으로 예상했으나 구름이 끼어 초반에는 달릴만하여 군중심리(群衆心理)와 조금의 과욕으로 속도를 내며 나아갔다.
의암댐을 건너 북한강변을 따라 달리며 산과 강이 어우르는 환경은 환상적이었다. 신매대교의 하프지점을 1시간51분28초로 통과 했고 그 때부터 구름이 걷히면서 햇볕이 나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더위에 약한 나는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머리에 붓는 등 더위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28km 지점인 춘천댐을 건너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에너지가 고갈(枯渴)되는 것을 느꼈다. 35km 지점에서는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고 조금 지나자 오른쪽 종아리까지 쥐가 났다. 37km 지점에서는 할 수 없이 들어 누었다.
종아리 쥐를 풀려다 더욱 심해져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걷다 달렸다 하면서 종아리 근육을 달래며 목적지를 향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다리에 온 신경을 쓰면서 최후까지 달려 결승점(決勝點)을 밟았다. 계속되는 변화의 적응 때문인가? 행사의 피곤함의 누적인가? 오버패스의 결과인가? 이렇게 힘들게 마라톤을 완주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케 하는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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