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서로 자원봉사..시민들 코리아환호
권이주 댓글:0 2012-11-25 10:20
필라델피아는 나에게 아주 인연이 깊은 도시다. 1988년 11월11일 형제 초청으로 아들, 딸, 아내와 함께 Miami를 거처 첫발을 밟은 그 때의 인상이 내 머리에 각인(刻印) 되어있는 곳이다.
필라델피아 마라톤은 2000년에 첫 출전후 지난해까지 10번 달렸다. 금년에는 Clif 회사 팀원으로 ‘4시간30분 Pacer’로서 봉사하고자 출전하였다.
Philadelphia는 유럽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Delaware의 일부 마을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인의 정착으로 시작, 스웨덴, 핀란드인이 바톤을 이어받다가 1664년 영국인이 정복했다. 1681년 William Penn이 영국 국왕 Charles 2세의 국채를 변제해 주고 1682년 식민지 지배권을 부여 받았다.
왕실 헌장에 불복(不服)하면서 원주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Penape 땅을 구입하고는 수장 Tammany와 Shackamaxon의 느릅나무 아래서 조약을 체결, 그리스어인 Phios(사랑, 우정)와 Adelphos(형제사랑)의 합성어인 Philadelphia로 명명하게 되었다.
Philadelphia 시청 건물 꼭대기에는 William Penn의 동상이 있으며 중심지인 Market Street와 Broad Street의 중앙에 세워져 Philadelphia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코스는 Schuylkill 강가에 세워진 박물관 앞에서 출발, 각국 국기가 펄럭이는 Benjamin Frankin Parkway를 따라가다 Delaware River를 만나 서쪽~북쪽으로 돌아 시내 6가를 통과, Chustnut Street를 지나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공원 Fairmount Park을 지난다, 이 공원은 무려 10,334 에이커(4,182 제곱km) 의 넓이에 동물원 등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공원을 내려와 Schuylkill River를 따라 원점인 박물관에 도착하면 13 마일, 그리고 북쪽 Kelly Rd를 6마일을 갔다오면 26.2 마일(42.195미터)이다.
미국의 유서(由緖) 깊은 도시답게 1776년 미국 독립 선언문이 선포되고, 미국 헌법 제정자가 서명했던 곳이며. 1790~1800년까지 10년 동안 미국 수도였고, Pennsilvania 주도(州都)였다가, 1799년 Harrisburg로 이전 되었다.
건국 사적 공원과 역사적 랜드마크의 중심지로 독립기념관, 자유의종, Benjamin Franklin 동상, 필라델피아 미술관, 대통령 집(조지 워싱턴, 존 아담스) 등과 Edger Allen Poe 시인 등을 배출한 도시며 미국에서 4번째로 오래된 IVY League 대학, University of Pennsylvania가 도심에 있다.
이 대학은 1740년 선교사 George Whitefield가 설교를 위한 홀을 지었고, 1749년 Benjamin Frankin이 미래 세대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 “펜실바니아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제안”(Propasals for the Education of youth in Pennsylvania)에 따라 설립되었다.
아들 전택이 이 학교에서 대학, 대학원을 다녔다. 생명공학 박사과정 중 정부의 연구 중단에 따라 조교 생활을 하다 의과 대학에 진학해 떠났고, Abington Hospital로 근무처가 되어 다시 Philadelphia에 오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인연이 특별하다.
나는 등록 선수가 아니므로 번호표가 없어 Bag을 일반 선수처럼 맡길 수가 없어 Elite 선수 텐트에 던져 놓고 출발 지점에 갔다. 태극기위에 빨강과 흰색 풍선에 ‘4:30분’이라고 써서 매달고 높이 들고 있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맨 앞 Elite 출발선이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2분 간격으로 Elite, 3:00, 3:15, 3:25, 3:45, 4:00, 4:15, 4:30 순으로 나갔다.
한참을 기다렸다. 4:30분의 Pacer Leader Jo 가 나타나 함께 출발했다. 워싱턴에서 오셨다는 47세의 여성이 꼭 4:30분안에 완주하고 싶다며 따라 왔고 그외 많은 런너들과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몸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이 되어 출발을 가볍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페이서로서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정말 큰 낭패(狼狽)이기 때문에 내 몸의 상태보다는 정확한 페이스로 정확한 시간에 완주(完走)해야 하는 의무감이 어깨를 무겁게 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4:30이라는 글자를 보고 따르는 수많은 런너들을 보며 한편 자랑스럽기도 했다. 응원객이나, 같이 달리는 런너들 마주오는 선수 등이 “South Korea” “대한민국”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 한국 말이 왜 그렇게 귀에 잘 들어오고,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내가 하는 일이 만족스러웠고, 자랑스러웠다. 목표 4시간30분, 마일당 10분18초!
2마일, 3마일 정확히 달리고 있었다. 4마일을 지나며 6th Street 시내를 통과 할때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고, “4시간30분” “South Korea” 하고 소리 칠 때는 태극기를 높이 들어 흔들어 주었다.
Fairmount Park를 넘어 Schuykill River을 따라 원점인 박물관 앞 13 마일 지점까지는 모두 잘들 따라오더니 한두명씩 뒤 처지기 시작했고 앞에 가던 런너들도 하나 둘 추월(追越)하기 시작했다.
마라톤은 이제부터다. 15 마일(24.1키로)를 넘으면 훈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꼭 4:30분 안에 완주하고 싶다던 여성도 뒤처져 보이지 않았다. 사실 페이서와 같이 달리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페이서는 일정하게 같은 속력으로 전 구간을 달리기 때문에 목표와 의지만으로는 따라오기 힘든 것이다.
뉴욕 마라톤이 허리케인 “샌디”로 취소되어 추가 인원을 수용한 탓에 주로를 꽉 메웠다. 마치 대 인파가 몰려가는 것 같았는데 그 중 한 두명이 페이스를 잃으면 뒤에 오는 런너에게 장애가 된다. 17 마일 갔을 때 한 여자 런너를 추월하려 할 때 “Don’t you pass me” 하며 앞으로 갔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밀며 “Let’s Go”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뒤처지고 말았다. 20 마일(32.1키로)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쓰러져 누운 채 봉사자의 손길을 바라는 런너들이 보였다. 안타까웠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25마일(40.2 마일)을 통과 할 때 플라스틱 태극기 대가 부러졌다. 힘이 들어 어깨에 기대고 달렸는데 무거웠는지. 흔들려서인지, 깜짝 놀랐다. 다행히 손잡이가 있어 태극기는 들고 달릴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결승점 현수막이 보였다. 함성 소리는 마치 나를 위한 태극의 함성 같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생각하도록 해 주었다.
미 대륙 어느 곳에서라도 태극기를 흔들며 달려 보자. 생명이 다 할 때까지. 그리고 말 하리라 “나는 한국인이다!”
메달을 목에 걸고 함께 달려온 4시30분 동반주들과 허그하고 헤어졌다. 그들도 기억하겠지 오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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